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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과 6월 민주항쟁

editor2811 2025. 2. 13. 11:09

전두환 정권과 6월 민주항쟁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군사 쿠데타

전두환 정권은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비상계엄을 통해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면서 대한민국은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새 정부를 구성하였으나, 군부 내 신군부 세력(하나회)을 중심으로 한 전두환, 노태우 등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정치적 안정을 명분으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며,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이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였고, 같은 해 8월 27일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강력한 권위주의 통치를 펼쳤으며, 민주화 요구를 철저히 탄압하면서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정권의 폭력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기 전,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였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은 신군부의 계엄 확대와 민주주의 탄압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군부는 특전사 부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고, 군부는 무차별적인 발포와 폭력을 행사하며 광주를 철저히 봉쇄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후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되었다. 군부의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점점 더 커져갔다.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통제

전두환 정권은 강력한 정치적 탄압과 언론 통제를 통해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다. 첫째, 1981년에는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되고,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체제로 변경되었다. 이를 통해 전두환은 국민의 직접적인 심판을 피하면서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둘째, 민주화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민주화 인사들은 체포되거나 고문을 당하였으며, 대학생 시위는 강경 진압되었다. 대표적으로 1982년 ‘부림 사건’과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사건’ 등이 있다. 셋째, 언론을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언론사 통폐합을 통해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을 제거하고, 국가가 언론 보도를 검열하며 정권에 유리한 정보만 보도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탄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요구는 점차 확산되었으며,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전두환 정권의 경제 정책과 사회적 불만

전두환 정권은 경제 성장을 주요 국정 과제로 내세웠으나,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 착취가 심화되면서 사회적 불만이 증가하였다. 첫째, 경제 성장과 함께 빈부 격차가 확대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 정책을 통해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혜택은 대기업과 특정 계층에 집중되었으며, 노동자와 서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둘째, 노동 탄압이 심화되었다. 노동조합 활동이 철저히 제한되었으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강요되었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같은 노동 운동 탄압 사례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셋째, 부패와 정경유착이 심각했다. 정권과 재벌 간의 유착이 강화되었으며, 국가 재정이 특정 기업과 군부 세력에게 유리하게 운영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문제들은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배경이 되었으며,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희생

1987년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당시 경찰은 박종철이 ‘책상을 두드리는 과정에서 질식사했다’는 허위 발표를 하였으나, 언론 보도를 통해 경찰의 고문이 밝혀지면서 전 국민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대학생들은 더욱 강력한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였으며,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었다.

6월 민주항쟁의 전개

1987년 6월 10일,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면서 ‘6월 민주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첫째, 시위대는 ‘호헌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이는 전두환 정권이 4월 13일 ‘호헌 조치’를 발표하며 현행 헌법을 유지하려 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둘째,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 등 주요 도시에서도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노동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셋째, 정부는 강경 진압을 시도했으나, 국민들의 강한 저항과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6월 29일, 당시 여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공식적으로 약속하였다.

6.29 민주화 선언과 전두환 정권의 종말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1987년 6월 29일,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을 통해 대한민국은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였으며, 이후 1987년 12월 대선이 실시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서 더 이상 독재를 유지할 수 없었으며, 결국 1988년 대통령직을 노태우에게 넘기면서 퇴진하였다. 그러나 이후 전두환은 내란죄와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1996년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이후 감형됨). 그의 퇴진 이후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두환 정권과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

전두환 정권은 군사독재와 강압적 통치를 통해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였으나,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6월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는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