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병합과 조선의 저항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주권이 완전히 상실되었고,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 헌병 경찰 제도를 도입하고, 언론과 교육을 철저히 검열하며 민족 정체성을 억압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운동을 펼쳐 나갔다. 지하에서 이루어진 저항운동은 독립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후일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이 되었다.
비밀 결사 조직의 활동
강제 병합 이후 조선인들은 지하에서 비밀 결사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대표적인 조직으로 신민회, 독립의군부, 대한광복회 등이 있었다. 신민회는 교육과 언론을 통해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독립의군부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며 군사적 저항을 조직했다. 대한광복회는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며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조직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조선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3·1 운동과 비밀 조직들의 역할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대규모 독립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 운동은 지하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조직적인 준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종교인, 학생, 지식인 등이 연합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일본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수많은 조선인을 체포하고 희생시켰다. 하지만 3·1 운동은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무장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의열단과 무장 투쟁
1919년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열단은 일본의 주요 기관과 고위 관리들을 직접 공격하는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폭탄을 사용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찰서 등을 공격하며 일본의 통치에 타격을 주었다. 또한,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하며 조선인들에게 독립의지를 심어주었다. 의열단의 활동은 일본 경찰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이후 독립운동 세력들이 보다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군과 만주 지역의 저항운동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조직했다. 대표적인 독립군 단체로는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에서 훈련을 받으며 무장투쟁을 준비했고, 1920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러한 전투는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의 식민 통치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내의 문화적 저항과 민족운동
무장투쟁과 함께 국내에서는 문화적 저항운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한글 교육을 통해 일본의 동화 정책에 저항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해 조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려 했으며, 일본은 이를 탄압하여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고 탄압했다. 또한, 조선인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물산 장려운동과 민족 기업 육성을 시도하며 일본 자본에 맞서 싸웠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확산
1920~1930년대에는 학생들과 노동자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학생들은 조선어 사용 금지와 식민 교육에 저항하며 시위를 벌였으며, 노동자들은 일본 기업과 공장에서의 착취에 저항하여 파업을 일으켰다. 1929년 광주 학생 항일운동은 일본 경찰의 조선 학생 탄압에 반발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조선 청년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조선 노동총동맹을 결성하여 일본 기업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싸우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태평양 전쟁과 광복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독립운동 세력은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여 연합군과 협력하며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속하며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며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다. 조선인들은 오랜 기간 지속된 지하 저항운동의 결실로 다시 독립을 이루었으며, 이후 대한민국 건국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